글결 서재

Rian Books · 15세 이상

잇테키마스: 어떤 출근길의 풍경

매일의 이동 속에서 발견하는 삶의 무늬

  1. 이야기를 시작하며
  2. 1장 잇테키마스
  3. 2장 골목길의 아침
  4. 3장 하루의 개찰
  5. 4장 물 위의 가랑잎처럼
  6. 5장 빨간 양동이의 통로
  7. 6장 8번 칸의 독서
  8. 무지개길로 사라진 뒷모습

2026. 10. 15. By 리안최

1장

잇테키마스

현관문 옆 아내의 쪽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샐러드와 두유, 견과류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샤워를 마친 뒤 여느 때보다 서둘러 집을 나선다.

현관문 옆에는 아내가 메모지에 한글로 '잇테키마스(다녀오겠습니다)'라고 적어 붙여 둔 쪽지가 있다. 며칠이 지나니 오늘은 굳이 눈으로 읽지 않아도 입에서 자연스럽게 '잇테키마스'가 흘러나온다. 신발을 신는 내 등 뒤로 "잘 다녀와" 하는 아내의 목소리와 우리집 충견 하몽이의 멍멍 소리가 함께 따라온다. 몇 년전부터 아파서 사지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목위만 살아서 잘먹고 여전히 건겅한 견공 복덩이는 혀바닫을 내밀고 조용히 자고 있나보다.

잇테키마스 — 현관문 옆 아내의 쪽지와 하몽이

2장

골목길의 아침

리어카 노인과 중년 부부

몇 주 전 도서관에서 빌린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개똥벌레』를 역에 있는 도서 반납함에 넣을 생각으로 손에 들고 나왔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가는 도서관이니 그때 반납해도 그만이지만, 며칠 전 허리를 다쳐 당분간은 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대출 기한도 2주라 며칠 남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역까지 걸어가는 사이 마음이 바뀌었다. 오늘 안에 다 읽고 반납하자.

골목길을 조금 내려가니 앞에 중년 남녀가 보인다. 밤색 세미 캐주얼 정장 차림의 남자는 손에 든 무언가를 뒤따라오는 여자에게 건네려는 듯 오른손을 내민 채 걷고 있다. 전형적인 40대 중년의 모습을 한 여자는 신발을 고쳐 신는 건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건지 연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남자보다 한두 걸음 뒤에서 뒤뚱뒤뚱 따라간다. 그러다 마침내 남자가 내민 물건을 받아 들고는, 남자가 크로스로 멘 검은 가방에 자연스럽게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꺼낸다. 걸음이 느린 두 사람을 앞질러 가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너무 멋있다."

"난 뭘 입어도 멋있지."

내 입가에 잠시 미소가 머문다.

새마을금고를 지나면, 얼마 전 빨래방을 허물고 둥근 모양으로 새로 지어 유리로 외벽을 두른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오늘도 어김없이 그 노인이 있다. 천막을 친 리어카 위에 대추와 땅콩, 멸치 따위를 네모난 그릇에 어수선하게 담아 두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노인. 겨울에는 붕어빵을, 여름과 가을에는 주로 대추와 미역, 멸치를 판다. 내 눈에는 집에서 먹다 남은 것을 들고 나온 것처럼 그리 정갈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누가 사 가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정말 팔려는 건지 소일거리 삼아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노인은 늘 물건을 쌓아 두고 둥근 철제 의자에 앉아 있다. 요즘은 누가 쓰다 준 것인지 돋보기와 선글라스까지 함께 늘어놓고 파는 모양이다.

골목길의 아침 — 앞서 걷는 중년 부부와 리어카 곁의 노인

3장

하루의 개찰

고소한 빵 냄새와 지하철

365일 문을 여는 약국을 지나 녹슨 지하철 계단으로 총총 내려선다. 대리석에 밴 녹물 자국이 이 역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매번 '청소를 왜 이렇게 안 할까' 싶기도 하다. 아침 빵 냄새가 고소하게 풍기는 지하 1층을 지나 지하 2층으로 내려가 개찰구에 스마트폰을 대면 '삑' 소리가 난다. 너는 성인이고 요금은 정상 처리되었다고 알려 주는 듯하다.

빵 냄새와 '삑' 소리 — 하루의 개찰

4장

물 위의 가랑잎처럼

전철 안의 공중도덕

일곱 시 반도 안 된 이른 아침인데도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다들 이렇게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늘 서는 1-4번 승강장에서 기다리는데, 앞차가 방금 떠났는지 오늘은 내가 두 번째다. 전철이 도착해 문이 열리면 매의 눈으로 내가 들어갈 공간을 확인하고, 가방을 앞으로 든 채 엉덩이부터 밀고 들어가 문 쪽을 보고 자세를 잡는다. 그러면 문이 닫힌다.

평소에는 전철이 오기 전에 이어폰을 끼고 자기계발 유튜브 오디오를 듣지만, 오늘은 반납할 책 『개똥벌레』까지 손에 들고 있어 가방을 든 채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다. 대개는 손잡이나 철제 봉을 잡지 못해 스스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나만의 비법이라면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열차가 좌우로 흔들릴 때 허벅지에 힘을 꽉 주어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앞에 여성이 서 있으면 더 난처해진다. 언론에서 성추행범으로 오인 신고되는 일을 많이 본 터라, 여성이 앞에 있으면 신경이 곤두서고 흔들림에도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어찌어찌 타기는 했지만 다음 역에서 사람들이 밀고 들어오면 여지없이 앞뒤 좌우 승객들과 부딪힌다.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지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그저 흐름에 맡길 뿐이다.

문이 닫히기 직전, 30대 중반쯤의 여성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내 앞으로 밀고 들어온다. 닿지 않으려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문이 닫히고, 나는 물 위에 뜬 가랑잎처럼 좌우로 흔들린다. 마지막에 탄 그녀는 문이 닫혔는데도 통화를 이어 간다.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린다. 뒤에서 그녀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자니, 오늘 아침 막 감고 나온 듯 갈색으로 염색한, 파마가 살짝 풀린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고 옅은 화장품 냄새가 난다. 왼손에 든 스마트폰은 왼쪽 귀에 바짝 붙이고, 오른팔에는 얇은 코트를 걸치고 있다.

한 정거장이면 끝나겠지 했던 통화는 계속되고, 은근히 공중도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가 신고라도 한 건지 스피커에서 여성 성우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지하철 안에서는 통화를 자제해 주십시오. 통화하실 때는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해 주세요."

다른 승객들 들으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통화에 열중한 그녀에게는 분명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통화는 종로3가에서 내릴 때까지 한참 이어졌다.

물 위의 가랑잎처럼 — 출근길 전철 안

5장

빨간 양동이의 통로

종로3가 환승길의 풍경

여성의 뒤통수만 보고 있기 민망해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그 좁은 틈에서도 스마트폰을 꺼내 인스타그램을 넘기거나 쇼핑을 하거나 웹툰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그녀 옆의 청년은 스레드를 열심히 스크롤하며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나는 전철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보는지 관찰하는 편이다.

종로3가에서 투덜투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려면 매일 물이 떨어지는 긴 환승 통로를 지나야 한다. 몇 년째 수건을 깔아 두거나, 물이 많이 샐 때는 빨간 양동이를 받쳐 둘 뿐 왜 고치지 않는지 모르겠다. 수시로 고장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호선으로 올라간다. 일 년에 몇 번이나 멈추는지 모를 만큼, 이렇게 고장이 잦은 에스컬레이터는 본 적이 없다.

몇 년째 그 자리의 빨간 양동이 — 종로3가 환승 통로

6장

8번 칸의 독서

흔들리는 전철 속 나만의 시간

1호선 승강장에 올라서자마자 전철이 들어오고, 다들 뛰어가 올라탄다. 나도 인파에 밀려 뛰다가 왼쪽 위 행선지 표시를 보니 '신창(천안)'행이다. 무작정 올라타자마자 문이 닫히며 내 엉덩이를 밀어붙인다. 평소에는 뒤쪽으로 가서 8번 칸을 타지만, 이렇게 전철이 바로 오면 다음 차가 인천행일 수도 있어 어쩔 수 없이 바로 타야 한다. 내가 8번 칸을 고집하는 건, 경험상 8번 칸 그중에서도 8-3번 출입문 쪽이 한적해 자리를 빨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넘게 서서 가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처럼 허리가 아플 때는 더더욱. 그래도 나는 하루 세 시간의 출퇴근길이 참 좋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할 시간을 확보하기에 이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첫해에는 영어와 스페인어를, 요즘은 일본어를, 때로는 AI를 공부하고 고전 오디오북을 듣는다.

오늘은 책을 읽을 요량으로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책을 펼치지도 못했다.

다행히 종각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내려 한산해지자, 문 옆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여성 앞에 서서 책을 펼쳤다. 사실 요즘 전철에서 책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스마트폰만 볼 뿐이다. 그녀의 책에도 어느 도서관의 스탬프가 찍혀 있는 걸 보니 왠지 동질감이 든다. 한 정거장 더 가 시청역에서 그녀가 책을 덮고 내리자, 나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렇게 빨리 앉는 것도 행운이다. 보통은 노량진역쯤 가야 자리가 난다.

책을 펴고 지난번에 읽다 만 「헛간을 태우다」의 뒷부분을 읽는다. 주인공이 그 남자와 카페에서 만나 헛간을 태웠느냐고 묻는 대목부터다. 이어 「춤추는 난쟁이」를 읽기 시작했을 때, 건강해 보이는 한 여성이 들어오더니 덥석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다. 요즘은 남자고 여자고 배려 없는 사람이 많다더니. 속으로 짜증을 내며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그녀가 무릎 위 가방을 돌리자 임산부 배지가 보인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자 미안함이 밀려오지만, 어쩌겠는가.

흔들리는 객차 안, 펼쳐 든 『개똥벌레』

무지개길로 사라진 뒷모습

동료에게 춤추는 난쟁이 꿈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한 여성이 들어온다. 주름진 검은색 짧은 스커트에 검은색 블라우스, 겨드랑이에 쏙 들어가는 작은 검은색 가방.

아, 그런데 나는 그녀의 스커트 아래를 보고 눈을 들지 못했다. 검은색 팬티스타킹의 오른쪽 다리, 스커트 바로 아래 두 군데가 찢어져 있어 너무 쉽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고 승객 일부가 내리자 그녀는 빈자리에 앉았고, 찢어진 부분이 드러나 나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이 펼쳐진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면 오늘 출근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 순간, 한 여성이 전철 문 옆 광고판에 빠른 손놀림으로 분양 광고와 영어 레슨 광고 전단 두 장을 스카치테이프로 붙이고 지나간다. 이 전단은 보통 50대쯤으로 보이는 키 크고 날씬한 여성과,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허리 구부정한 여성이 붙인다. 누구 하나 제지하지 않고 지하철 측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볼 때마다 놀라곤 한다. 몇 년째 저렇게 해도 별일이 없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눈이 아파 잠시 눈을 감고 있자니, 옆에 앉은 덩치 큰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잠에 빠졌는지 점점 내 쪽으로 기울어진다. 곧 머리를 내 가슴에 파묻을 기세다. 그 순간 내앞에 서 있는 여성이 전화가 왔는지 스마트폰 꺼내서 한국말로 통화를 하더니 말소리가 커지면서 중국어로 연신 뭔가를 설명 하기 시작한다. 사실 난 중국어를 모르니 설명하는건지 싸우는건지 알수는 없다. 주변 사람들이 다 들릴 정도로 큰소리로 통화를 하자 모두 돌아 보지만 그 중국인은 아랑곳없다. 아니 아마 조선족 일게 분명하다. 요즘은 전철을 타면 항상 한칸에 한명이상은 외국인이 있다. 내가 외국인 이라고 하는 것은 피부색으로 확연히 들어나거나 외국을 복장을 한 사람일 테니 물론 그보다 더 많을수 있다. 내가 내리는 곳은 대학교가 있어서 9시경에 도착하는 전철을 타게되면 검은색 피부를 가진 세련된 옷차림과 멋진 외모의 남성이 항상 같이 내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는 영어선생일거야 하고 어림 짐작할 뿐이다. 오늘은 왜 이러나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다시 책을 펼친다. 난쟁이가 몸속으로 들어가 춤을 추고, 주인공이 그녀와 키스를 한 뒤 그녀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하는 대목까지 읽었을 때 내릴 역에 닿았다. 책을 덮고 허리를 펴며 일어서는데, 스타킹이 찢어진 그 여성도 내리려는지 일어나 돌아선다. 뒷모습은 더 엉망이었다. 오른쪽 허벅지 뒤쪽이 무릎 접히는 곳 바로 위까지 휑하게 찢겨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그녀를 뒤에서 보며, 나만 본 것도 아닐 텐데 괜히 내가 민망해지는 건 왜일까. 우연히도 그녀는 나와 같은 출구로, 나보다 10여 미터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너 내가 가려던 무지개길로 들어섰지만, 나는 차들에 막혀 신호를 놓쳤다. 뒤늦게 횡단보도를 건너 무지개길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활기차고 선선한 공기를 피부로 느끼며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오늘도 무지개 길을 걸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를 시작한다.

신호 하나 차이 — 인파 속으로 사라진 무지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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